부산 사직동에 사직단이 없던 100년 — 마을 당집이 자리를 내줬다

부산 사직동에 사직단이 없던 100년 — 마을 당집이 자리를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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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구 사직동의 이름은 사직단에서 왔습니다. 사(社)는 토지의 신, 직(稷)은 곡식의 신이고, 사직단은 나라가 그 둘에게 풍년과 안녕을 빌던 제단입니다. 그런데 동네 이름이 된 그 사직단은 일제강점기에 헐린 뒤 100년 가까이 이 동네에 없었습니다. 2021년 2월에 다시 세워졌는데, 복원된 자리는 마을 사람들이 대대로 제사 지내던 당집이 내놓은 땅입니다.

담장 너머로 붉은 홍살문이 서 있고 뒤로 재실 기와지붕과 고층 아파트가 보이는 동래사직단
2021년에 복원된 동래사직단. 홍살문 뒤로 재실이 있고, 담장 너머는 고층 아파트다. 2026년 9월 18일 촬영
부산 한눈에 — 대상·금액·신청 요약
부산 요약 표지 — 마을 당집이 자리를 내줬다이름의 순서 — 사직동이라는 이름 사직단이 있었기 때문에 생겼다, 1914년 석사·여고·거인 세 마을이 합쳐짐, 1916년 여고동에서 사직동으로, 당집이 둘인 이유 합쳐지기 전 마을들이 각자 제당을 가졌다1640년에 세우고 1709년에 옮겼다 — 1640년 동래부사 정호서가 세움, 1709년 동래부사 권이진이 옮겨 다시 지음, 규모 정당 1칸 · 재실 5칸, 옮긴 거리 지금 자리에서 직선 약 50m되살린 땅은 당집이 내놓았다 — 일제강점기 제사 폐지·단 훼철 — 표석만 남았다, 복원 2015년 착수 → 2021년 2월 8일 준공, 사업비 32억 6,600만 원, 부지 여고 주산당이 양보한 950㎡놓치기 쉬운 것 — 원래 자리에는 이미 도로와 주택이 들어서 있습니다 — 옛 터로 지목되는 자리에는 안내판 하나 서 있지 않고, 구는 인근 부지에 복원하고 원 위치에는 동판 표석을 세웠습니다. / 복원 부지는 마을 당집이 내놓은 땅입니다 — 여고 주산당이 2019년에 양보했고, 그 당산터 역시 1934년에 한 주민이 임야를 기증해 생긴 것이었습니다. / 부산에 남아 있던 사직단은 이곳 하나뿐이었습니다 — 동네 이름만 남고 근거가 사라진 경우는 부산에 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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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이름이 먼저가 아니라 제단이 먼저였다

사직동이라는 이름은 사직단이 있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순서가 반대가 아닙니다.

동네 이름만 남고 그 이름의 근거가 사라진 경우는 부산에 또 있습니다. 대연동의 못골도 못이 있던 골짜기라는 뜻인데 못은 1970년대에 모두 메워졌습니다.

지금의 사직동은 원래 여러 자연마을이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석사(石社)·여고(余古)·거인 세 마을이 하나로 합쳐져 동래군 동래면 여고동이 되었고, 1916년에 사직동으로 바뀌었습니다. 동네에 당집이 둘인 것도 여기서 나옵니다 — 합쳐지기 전 마을들이 각자 제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산 웹툰 — 사직동에 사직단이 없었다
부산 웹툰 표지 — 사직동에 사직단이 없었다웹툰 1컷 — 1. 거북이가 사직동 이름의 뜻을 찾아본다 (사직단에서 왔다고?)웹툰 2컷 — 2. 정작 100년 가까이 없었다는 걸 안다 (일제강점기에 헐렸구나)웹툰 3컷 — 3. 부엉이가 복원 내력을 알려 준다 (당집이 땅을 내놓았어요)웹툰 4컷 — 4. 거북이가 복원된 사직단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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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년에 세우고 1709년에 옮겼다

동래 사직단은 1640년 동래부사 정호서가 세웠습니다. 그 뒤 1709년 동래부사 권이진이 지금 자리 가까이로 옮겨 정당 1칸, 재실 5칸 규모로 다시 지었습니다.

옮긴 자리는 지금 사직단에서 여든 걸음 남짓 떨어진 곳이었다고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직선으로 재면 약 50m,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옆 블록입니다. 그 자리에는 지금 신동아맨션이 서 있습니다.

지도 위에 옛 사직단 터(신동아맨션)와 현재 동래사직단 위치를 점으로 찍고 두 점을 점선으로 이어 직선 50m라고 표시한 그림
옛 자리(348-17, 지금은 신동아맨션)와 지금 자리(350-3·407·407-3·408). 지번은 국토교통부 지적도, 거리는 직접 기록한 GPX 좌표로 계산. 배경지도 ⓒ OpenStreetMap contributors
주차장 너머 왼쪽 멀리 보이는 신동아맨션 건물을 빨간 원으로 표시한 사진. 벽에 신동아맨션이라는 글씨가 작게 보인다
빨간 원 안이 옛 사직단 터로 지목되는 자리다. 사진 앞쪽 주차장이 아니라 그 너머 신동아맨션이 선 자리이고, 안내판 하나 서 있지 않다. 2026년 9월 18일 촬영

일제강점기에 제사가 끊기고 단이 헐렸다

일제강점기에 사직단 제사가 폐지되고 단은 헐렸습니다. 그 뒤 자리에 집이 들어서면서 터 자체가 지워졌고, 오랫동안 표석 하나만 남아 있었습니다. 부산에 남아 있던 사직단은 이곳 하나뿐이었습니다.

복원은 2015년에 시작해 2021년 2월 8일에 준공했습니다. 사업비는 32억 6,600만 원입니다. 다만 원래 자리에는 이미 도로와 주택이 들어서 있어, 구는 인근 950㎡ 부지에 복원하고 원 위치에는 동판 표석을 세웠습니다.

1640년 건립부터 1709년 이건, 일제강점기 훼철, 2015년 착수, 2019년 부지 양보, 2021년 2월 8일 준공까지를 세로로 정리한 연표
동래 사직단 연표. 부산광역시 동래구 자료와 현장 안내판을 대조해 직접 작성

되살린 땅은 마을 당집이 내놓은 것이다

복원 부지는 여고 주산당이 양보한 땅입니다. 주산당은 마을 수호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당집입니다.

사직단 안에는 그 내력을 적은 비석이 서 있습니다. 「주산당 제단」이라는 이름으로 주산당 보존회가 단기 4354년(2021년) 1월 27일에 세운 것이고, 비문은 이렇게 적습니다.

여고 주산당은 여고부락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제례를 지내던 당산터로써 2019년 사직단복원사업을 위하여 부지를 양보하였으며, 1934년 2월 4일 임야 오백여 평을 당산터로 기증한 김녕김씨 성술공의 공덕비와, 이조말엽 여고부락민에게 전재산을 기증한 양공의 공덕비를 이곳에 매안하고, 여고부락민들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주산당 제단을 세운다

사직단 안에 선 주산당 제단 비석의 비문 전문을 옮겨 적은 카드. 2019년 사직단복원사업을 위하여 부지를 양보하였으며 부분이 강조되어 있다
사직단 안 「주산당 제단」 비문. 2021년 복원 직후 안에서 확인한 내용이다. 2026년 9월 답사일에는 출입문이 닫혀 있어 다시 보지 못했다

기증이 두 번 겹쳐 있다

비문을 그대로 읽으면 땅이 두 번 건네진 것이 보입니다.

  1. 1934년 2월 4일 — 김녕김씨 성술공이 임야 오백여 평을 당산터로 기증했습니다. 마을의 제사터는 이때 생겼습니다.
  2. 2019년 — 그 당산터가 사직단 복원 사업에 자리를 내줬습니다.

여기에 더해 이조말엽 여고부락민에게 전 재산을 기증한 양공의 공덕비가 있었고, 두 공덕비는 복원 과정에서 그 자리에 매안(묻음)하고 그 위에 제단을 세웠습니다.

지적도에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사직단이 선 350-3·407-3과 바로 옆 411-3은 지목이 종교용지이고, 그 사이 408은 묘지입니다. 비문이 말하는 90년 전 기증이 공적 장부의 지목으로 남아 있는 셈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나라가 제사 지내던 자리가 사라지자, 마을이 제사 지내던 자리가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당집은 둘이다 — 할매신과 할배신

사직동에는 주산당이 둘입니다. 모시는 신이 다릅니다.

당집모시는 신위치지금
석사 주산당할매신(여신)사직1동 74-35골목 한가운데 남아 있다
여고 주산당할배신(남신)사직동 350-3그 자리에 사직단이 서 있다

향토문화전자대전은 석사 주산당에 대해 “모시는 수호신은 할매신으로서 인근의 여고 주산당에서 모시는 할배신과 서로 마주하고 있다”고 적습니다. 제사는 음력 정월 초하루 자정에 지내고 지금도 이어집니다. 석사 주산당의 옛 제당은 동쪽 야산 위에 있었는데 1976년에 마을 한가운데인 지금 자리로 옮겨 지었습니다.

단청을 올린 솟을대문 형태의 당집. 담장 사이에 끼어 있고 문은 닫혀 있다
석사 주산당. 좁은 골목 한가운데에 단청을 올린 대문이 서 있다. 2026년 9월 18일 촬영
지도 위에 석사 주산당과 여고 주산당 자리를 표시하고 각각 할매신, 할배신이라고 적은 그림
당집 둘의 위치. 여고 주산당 자리에는 지금 사직단이 있다. 배경지도 ⓒ OpenStreetMap contributors

시장은 넷이고, 야구장보다 먼저 생겼다

사직동 일대를 걷다 보면 전통시장이 계속 나옵니다. 걸어서 6분 거리에 시장이 둘, 조금 넓히면 넷입니다.

시장등록·인정점포 수
금강시장1976. 4. 2. 등록52
신정시장1977. 3. 15. 등록39
국민시장2012. 6. 29. 인정93
사직시장2012. 6. 29. 인정116

부산광역시 동래구 전통시장 현황(2026-10-01 조회)에서 사직동·온천동 소재 4곳만 뽑아 정리했습니다. 날짜는 개설 연도가 아니라 법적 등록·인정일입니다.

표를 읽을 때 두 가지를 같이 봐야 합니다.

첫째, 등록시장과 인정시장은 다릅니다. 금강·신정은 1970년대에 등록을 마쳤지만, 국민시장과 사직시장은 2012년 6월 29일에 나란히 ‘인정시장’이 되었습니다. 동래구 자료에 따르면 국민시장은 1977년에 문을 열었으니, 35년 가까이 법적 지위 없이 장이 섰다는 뜻입니다.

둘째, 시장이 야구장보다 먼저입니다. 사직야구장은 1980년 7월에 기공해 1985년 10월에 완공했고, 롯데 자이언츠 홈구장이 된 것은 1986년입니다. 네 시장은 모두 그보다 앞섭니다. “야구장 배후 상권이라 시장이 많다”는 설명은 시간 순서가 맞지 않습니다. 순서는 주택가 → 시장 → 야구장입니다.

금강 1976, 국민 1977, 신정 1977, 사직 1978, 사직야구장 1985를 세로로 정리한 연표
사직동 일대 시장 넷과 야구장. 부산광역시 동래구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자료를 대조해 직접 작성

왜 한꺼번에 생겼는지에 대한 단서도 있습니다. 향토문화전자대전은 신정시장의 건립 경위를 “1970년대부터 동래구 사직동 지역에 주거지가 형성되면서 시장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고, 그에 따라 부동산 개발업자가 인위적으로 시장 건물을 지어 점포 분양을 하면서 개설되었다”고 적습니다. 주택가가 한꺼번에 커지던 시기였고, 적어도 한 곳은 민간 분양 사업이었습니다.

지금은 격차가 벌어졌습니다. 신정시장은 2012년 기준 점포 45개 가운데 빈 점포가 21개였고, 같은 자료는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인근에 대형 마트와 기업형 슈퍼 등이 들어오면서 시장이 급격히 위축되었다”고 적습니다.

좁은 골목 양쪽에 점포가 늘어서 있고 오토바이와 트럭이 서 있는 금강시장
금강시장. 큰길에서 한 블록만 들어오면 바로 시장이 시작된다. 2026년 9월 18일 촬영

벽화는 학교 앞이 아니다

사직단에서 내려오는 옹벽에 타일 벽화가 붙어 있습니다. 한쪽에 “2016. 11. 여고초등학교 6학년 작품”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여고초등학교는 여기서 305m 떨어져 있습니다. 학교 앞 벽화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 이 옹벽에 붙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옹벽에 붙은 타일 벽화. 한자 사자성어를 쓴 타일과 아이들이 그린 그림 타일이 나란히 이어져 있다
사직단 아래 옹벽의 타일 벽화. 2026년 9월 18일 촬영

걸어 보면 — 미남역에서 사직로까지 4.35km

2026년 9월 18일에 직접 걸었습니다. 미남역에서 출발해 사직동을 한 바퀴 돌고 사직로에서 마쳤고, GPX 기록으로 4.35km, 1시간 3분이 걸렸습니다.

출발점인 미남역은 부산 도시철도 3호선과 4호선이 만나는 환승역이고, 행정구역은 사직동이 아니라 온천동입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사직동으로 넘어갑니다.

순서대로 보면 이렇습니다.

  1. 미남역 남쪽 큰길 → 금강시장(약 5분 지점)
  2. 주택가 골목 → 동래사직단(약 14분)
  3. 벽화 → 사직역 사거리 → 석사 주산당(약 23분)
  4. 사직시장(약 28분) → 주택가·아파트
  5. 국민시장(약 48분) → 사직로에서 종료

오르막이 조금 있지만 대체로 평탄합니다. 사직단은 담 밖에서 홍살문과 재실, 안내판을 볼 수 있습니다.

부산 사직동 걷기 — 사직동에 사직단이 없던 100년
부산 사직동 걷기 — 사직동에 사직단이 없던 100년

부산을 걸어서 둘러보실 생각이라면 범일역에서 대연역까지 5km와 광안리 5.3km에 구간별 소요 시간과 그늘 유무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동래 사직단 터라고 적힌 검은 안내판. 한글과 영문, 옛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사직단 앞 안내판 「동래 사직단(東萊 社稷壇) 터」. 2026년 9월 18일 촬영

자주 묻는 질문

사직동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 지내던 사직단에서 왔습니다. 1914년에 석사·여고·거인 세 마을이 합쳐져 여고동이 되었다가 1916년에 사직동으로 바뀌었습니다.

동래사직단은 지금 볼 수 있나요?

2021년 2월에 복원되어 부산 동래구 아시아드대로164번길 32에 있습니다. 다만 2026년 9월 18일 답사 당시에는 출입문이 닫혀 있어 담 밖에서만 볼 수 있었습니다. 안에 들어가려면 동래구에 개방 시간을 미리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복원된 자리가 원래 자리인가요?

아닙니다. 원래 자리에는 도로와 주택이 들어서 있어 인근 950㎡ 부지에 복원했고, 원 위치에는 동판 표석을 세웠습니다. 1709년에 옮긴 자리는 지금 사직단에서 “여든 걸음 남짓”으로 기록돼 있고, 직선으로 약 50m입니다.

사직동에 전통시장이 왜 이렇게 많나요?

1970년대 후반에 주택가가 한꺼번에 커졌기 때문입니다. 금강·신정시장이 1976~77년에 등록을 마쳤고, 국민·사직시장도 같은 시기에 문을 열었습니다. 적어도 신정시장은 부동산 개발업자가 시장 건물을 지어 점포를 분양하면서 생겼습니다.

주산당은 지금도 제사를 지내나요?

석사 주산당은 음력 정월 초하루 자정에 제사를 지내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약

확인하지 못한 것

정직하게 남겨 둡니다.

참고 자료

이 글은 일반적인 생활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날짜·제도·시세 등은 변동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결정 전에는 관련 기관의 공식 안내를 한 번 더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최종 갱신: 2026년 10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