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직동에 사직단이 없던 100년 — 마을 당집이 자리를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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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구 사직동의 이름은 사직단에서 왔습니다. 사(社)는 토지의 신, 직(稷)은 곡식의 신이고, 사직단은 나라가 그 둘에게 풍년과 안녕을 빌던 제단입니다. 그런데 동네 이름이 된 그 사직단은 일제강점기에 헐린 뒤 100년 가까이 이 동네에 없었습니다. 2021년 2월에 다시 세워졌는데, 복원된 자리는 마을 사람들이 대대로 제사 지내던 당집이 내놓은 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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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이름이 먼저가 아니라 제단이 먼저였다
사직동이라는 이름은 사직단이 있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순서가 반대가 아닙니다.
동네 이름만 남고 그 이름의 근거가 사라진 경우는 부산에 또 있습니다. 대연동의 못골도 못이 있던 골짜기라는 뜻인데 못은 1970년대에 모두 메워졌습니다.
지금의 사직동은 원래 여러 자연마을이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석사(石社)·여고(余古)·거인 세 마을이 하나로 합쳐져 동래군 동래면 여고동이 되었고, 1916년에 사직동으로 바뀌었습니다. 동네에 당집이 둘인 것도 여기서 나옵니다 — 합쳐지기 전 마을들이 각자 제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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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년에 세우고 1709년에 옮겼다
동래 사직단은 1640년 동래부사 정호서가 세웠습니다. 그 뒤 1709년 동래부사 권이진이 지금 자리 가까이로 옮겨 정당 1칸, 재실 5칸 규모로 다시 지었습니다.
옮긴 자리는 지금 사직단에서 여든 걸음 남짓 떨어진 곳이었다고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직선으로 재면 약 50m,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옆 블록입니다. 그 자리에는 지금 신동아맨션이 서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제사가 끊기고 단이 헐렸다
일제강점기에 사직단 제사가 폐지되고 단은 헐렸습니다. 그 뒤 자리에 집이 들어서면서 터 자체가 지워졌고, 오랫동안 표석 하나만 남아 있었습니다. 부산에 남아 있던 사직단은 이곳 하나뿐이었습니다.
복원은 2015년에 시작해 2021년 2월 8일에 준공했습니다. 사업비는 32억 6,600만 원입니다. 다만 원래 자리에는 이미 도로와 주택이 들어서 있어, 구는 인근 950㎡ 부지에 복원하고 원 위치에는 동판 표석을 세웠습니다.
되살린 땅은 마을 당집이 내놓은 것이다
복원 부지는 여고 주산당이 양보한 땅입니다. 주산당은 마을 수호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당집입니다.
사직단 안에는 그 내력을 적은 비석이 서 있습니다. 「주산당 제단」이라는 이름으로 주산당 보존회가 단기 4354년(2021년) 1월 27일에 세운 것이고, 비문은 이렇게 적습니다.
여고 주산당은 여고부락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제례를 지내던 당산터로써 2019년 사직단복원사업을 위하여 부지를 양보하였으며, 1934년 2월 4일 임야 오백여 평을 당산터로 기증한 김녕김씨 성술공의 공덕비와, 이조말엽 여고부락민에게 전재산을 기증한 양공의 공덕비를 이곳에 매안하고, 여고부락민들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주산당 제단을 세운다
기증이 두 번 겹쳐 있다
비문을 그대로 읽으면 땅이 두 번 건네진 것이 보입니다.
- 1934년 2월 4일 — 김녕김씨 성술공이 임야 오백여 평을 당산터로 기증했습니다. 마을의 제사터는 이때 생겼습니다.
- 2019년 — 그 당산터가 사직단 복원 사업에 자리를 내줬습니다.
여기에 더해 이조말엽 여고부락민에게 전 재산을 기증한 양공의 공덕비가 있었고, 두 공덕비는 복원 과정에서 그 자리에 매안(묻음)하고 그 위에 제단을 세웠습니다.
지적도에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사직단이 선 350-3·407-3과 바로 옆 411-3은 지목이 종교용지이고, 그 사이 408은 묘지입니다. 비문이 말하는 90년 전 기증이 공적 장부의 지목으로 남아 있는 셈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나라가 제사 지내던 자리가 사라지자, 마을이 제사 지내던 자리가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당집은 둘이다 — 할매신과 할배신
사직동에는 주산당이 둘입니다. 모시는 신이 다릅니다.
| 당집 | 모시는 신 | 위치 | 지금 |
|---|---|---|---|
| 석사 주산당 | 할매신(여신) | 사직1동 74-35 | 골목 한가운데 남아 있다 |
| 여고 주산당 | 할배신(남신) | 사직동 350-3 | 그 자리에 사직단이 서 있다 |
향토문화전자대전은 석사 주산당에 대해 “모시는 수호신은 할매신으로서 인근의 여고 주산당에서 모시는 할배신과 서로 마주하고 있다”고 적습니다. 제사는 음력 정월 초하루 자정에 지내고 지금도 이어집니다. 석사 주산당의 옛 제당은 동쪽 야산 위에 있었는데 1976년에 마을 한가운데인 지금 자리로 옮겨 지었습니다.
시장은 넷이고, 야구장보다 먼저 생겼다
사직동 일대를 걷다 보면 전통시장이 계속 나옵니다. 걸어서 6분 거리에 시장이 둘, 조금 넓히면 넷입니다.
| 시장 | 등록·인정 | 점포 수 |
|---|---|---|
| 금강시장 | 1976. 4. 2. 등록 | 52 |
| 신정시장 | 1977. 3. 15. 등록 | 39 |
| 국민시장 | 2012. 6. 29. 인정 | 93 |
| 사직시장 | 2012. 6. 29. 인정 | 116 |
부산광역시 동래구 전통시장 현황(2026-10-01 조회)에서 사직동·온천동 소재 4곳만 뽑아 정리했습니다. 날짜는 개설 연도가 아니라 법적 등록·인정일입니다.
표를 읽을 때 두 가지를 같이 봐야 합니다.
첫째, 등록시장과 인정시장은 다릅니다. 금강·신정은 1970년대에 등록을 마쳤지만, 국민시장과 사직시장은 2012년 6월 29일에 나란히 ‘인정시장’이 되었습니다. 동래구 자료에 따르면 국민시장은 1977년에 문을 열었으니, 35년 가까이 법적 지위 없이 장이 섰다는 뜻입니다.
둘째, 시장이 야구장보다 먼저입니다. 사직야구장은 1980년 7월에 기공해 1985년 10월에 완공했고, 롯데 자이언츠 홈구장이 된 것은 1986년입니다. 네 시장은 모두 그보다 앞섭니다. “야구장 배후 상권이라 시장이 많다”는 설명은 시간 순서가 맞지 않습니다. 순서는 주택가 → 시장 → 야구장입니다.
왜 한꺼번에 생겼는지에 대한 단서도 있습니다. 향토문화전자대전은 신정시장의 건립 경위를 “1970년대부터 동래구 사직동 지역에 주거지가 형성되면서 시장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고, 그에 따라 부동산 개발업자가 인위적으로 시장 건물을 지어 점포 분양을 하면서 개설되었다”고 적습니다. 주택가가 한꺼번에 커지던 시기였고, 적어도 한 곳은 민간 분양 사업이었습니다.
지금은 격차가 벌어졌습니다. 신정시장은 2012년 기준 점포 45개 가운데 빈 점포가 21개였고, 같은 자료는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인근에 대형 마트와 기업형 슈퍼 등이 들어오면서 시장이 급격히 위축되었다”고 적습니다.
벽화는 학교 앞이 아니다
사직단에서 내려오는 옹벽에 타일 벽화가 붙어 있습니다. 한쪽에 “2016. 11. 여고초등학교 6학년 작품”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여고초등학교는 여기서 305m 떨어져 있습니다. 학교 앞 벽화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 이 옹벽에 붙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걸어 보면 — 미남역에서 사직로까지 4.35km
2026년 9월 18일에 직접 걸었습니다. 미남역에서 출발해 사직동을 한 바퀴 돌고 사직로에서 마쳤고, GPX 기록으로 4.35km, 1시간 3분이 걸렸습니다.
출발점인 미남역은 부산 도시철도 3호선과 4호선이 만나는 환승역이고, 행정구역은 사직동이 아니라 온천동입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사직동으로 넘어갑니다.
순서대로 보면 이렇습니다.
- 미남역 남쪽 큰길 → 금강시장(약 5분 지점)
- 주택가 골목 → 동래사직단(약 14분)
- 벽화 → 사직역 사거리 → 석사 주산당(약 23분)
- 사직시장(약 28분) → 주택가·아파트
- 국민시장(약 48분) → 사직로에서 종료
오르막이 조금 있지만 대체로 평탄합니다. 사직단은 담 밖에서 홍살문과 재실, 안내판을 볼 수 있습니다.
부산을 걸어서 둘러보실 생각이라면 범일역에서 대연역까지 5km와 광안리 5.3km에 구간별 소요 시간과 그늘 유무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사직동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 지내던 사직단에서 왔습니다. 1914년에 석사·여고·거인 세 마을이 합쳐져 여고동이 되었다가 1916년에 사직동으로 바뀌었습니다.
동래사직단은 지금 볼 수 있나요?
2021년 2월에 복원되어 부산 동래구 아시아드대로164번길 32에 있습니다. 다만 2026년 9월 18일 답사 당시에는 출입문이 닫혀 있어 담 밖에서만 볼 수 있었습니다. 안에 들어가려면 동래구에 개방 시간을 미리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복원된 자리가 원래 자리인가요?
아닙니다. 원래 자리에는 도로와 주택이 들어서 있어 인근 950㎡ 부지에 복원했고, 원 위치에는 동판 표석을 세웠습니다. 1709년에 옮긴 자리는 지금 사직단에서 “여든 걸음 남짓”으로 기록돼 있고, 직선으로 약 50m입니다.
사직동에 전통시장이 왜 이렇게 많나요?
1970년대 후반에 주택가가 한꺼번에 커졌기 때문입니다. 금강·신정시장이 1976~77년에 등록을 마쳤고, 국민·사직시장도 같은 시기에 문을 열었습니다. 적어도 신정시장은 부동산 개발업자가 시장 건물을 지어 점포를 분양하면서 생겼습니다.
주산당은 지금도 제사를 지내나요?
석사 주산당은 음력 정월 초하루 자정에 제사를 지내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약
- 사직동 이름은 사직단에서 왔고, 사직단은 1640년에 세워 1709년에 지금 자리 가까이로 옮겼습니다.
- 일제강점기에 헐려 100년 가까이 없었고, 2015년에 복원을 시작해 2021년 2월 8일에 준공했습니다(사업비 32억 6,600만 원).
- 복원 부지는 마을 당집(여고 주산당)이 2019년에 양보한 땅이고, 그 당산터도 1934년에 기증받은 것이었습니다.
- 사직동 당집은 둘이고 석사는 할매신, 여고는 할배신을 모십니다. 1914년에 세 마을이 합쳐진 흔적입니다.
- 일대 전통시장은 넷이고 모두 사직야구장(1985년 완공)보다 먼저 생겼습니다.
확인하지 못한 것
정직하게 남겨 둡니다.
- 현장 안내판과 보도의 설명이 어긋납니다. 안내판은 “이곳은 조선시대 동래 사직단이 있었던 곳이다”로 시작하는데, 2021년 보도는 “원래 자리가 아니라 인근에 복원했다”고 전합니다. 1709년에 옮긴 자리가 “여든 걸음” 거리라는 기록을 감안하면 안내판이 일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히지만, 동래구에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 사직단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답사일에 출입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비문 내용은 복원 직후에 안에서 확인한 것이고, 이번에는 담 밖에서 안내판만 다시 봤습니다.
- 여고 주산당이 지금 어디서 제사를 지내는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당산터를 사직단에 내준 뒤의 사정은 이 글의 자료로는 알 수 없습니다.
- 벽화가 왜 학교에서 305m 떨어진 옹벽에 붙었는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 점포 수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자료 기준입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자료와는 4~15개 차이가 나는데 기준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쪽만 골라 적었습니다.
참고 자료
- 직접 답사 2026년 9월 18일(금) — GPX 기록 4.35km, 1시간 3분(미남역 출발, 사직로 도착). 사직단은 출입문이 닫혀 있어 담 밖에서만 확인
- 부산광역시 동래구 — 전통시장 현황(시장별 소재지·점포수·등록/인정일), 2026-10-01 조회
- 부산광역시 동래구 — 사직2동 국민시장 공영주차장 준공(국민시장 1977년 개설·2012년 6월 인정), 2016-12-29
- 부산일보 — 사직동 지명의 뿌리, 부산 하나뿐인 사직단 복원(2021-02-23)
- 한국일보 — 일제가 없앤 부산 동래사직단 다시 태어나다(2021-02-24)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사직동 석사 주산 당산제(할매신·제일·1976년 중건)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사직동 여고 주산 당산제(할배신)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신정 시장(1977년 3월 15일 등록, 개발업자 분양, 2012년 빈 점포 21개)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미남역
- 현장 비문 「주산당 제단」(주산당 보존회, 단기 4354년 1월 27일) — 2021년 복원 직후 사직단 안에서 확인
- 현장 안내판 「동래 사직단(東萊 社稷壇) 터」 — 2026년 9월 18일 담 밖에서 촬영
이 글은 일반적인 생활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날짜·제도·시세 등은 변동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결정 전에는 관련 기관의 공식 안내를 한 번 더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최종 갱신: 2026년 10월 2일.